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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화학물질 ‘에틸렌옥사이드(Eto)’의 사용 제한에 대한 규제가 일시적으로 연기됐다는 소식은 체외진단의료기기 제조사 입장에선 짧은 휴식 같은 소식이다. 당장 GMP 기준 변경이나 ISO 13485 재정비까지 손이 닿지 않았던 중소기업들에겐 무거운 돌덩이가 살짝 들어 올려진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단지 시간을 번 것일 뿐, 본질은 여전히 남아 있다.

국내 대부분의 체외진단용 의료기기는 여전히 EO 멸균 공정에 의존하고 있다. 제조 공정의 안전성, 안정성, 유효성에 대한 판단이 여전히 확실하지 않은 가운데, 규제 시계가 잠시 멈춘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점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EO 멸균의 의존도, 산업 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

대한민국 내 EO 멸균 설비는 일부 대형 OEM 공장에 집중되어 있다. 중소기업은 자체 멸균 시설 없이 위탁 생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고, 위탁처마저 한정돼 있어서 병목 현상은 이미 수년 전부터 존재해 왔다. 이번 규제 연기로 산업계는 시간은 벌었지만, 구조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다. 특히 체외진단 의료기기의 경우, 재고 회전율이 짧고 긴급 공급 이슈가 자주 발생하는데, 멸균 지연은 곧바로 납기 문제로 이어진다. 결국 EO 대체 멸균 기술에 대한 투자가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을 유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대체 멸균 기술, 실현 가능성은 어디쯤 와 있나

플라즈마, 전자빔(e-beam), 감마선 등의 대체 멸균법이 논의되고 있지만, 여전히 체외진단의료기기 특성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전자빔은 고온에 민감한 시약 성분이나 필름 구조물에 손상을 줄 수 있고, 감마선은 물성 안정성에 영향을 준다는 우려가 크다. 플라즈마 멸균은 물리적 공간 한계와 공정 단가 문제로 인해 아직 대량 생산엔 한계가 있다. 산업계는 여전히 EO 멸균의 "비용 대비 효율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 한계 안에서 공정 최적화나 공정 밸리데이션을 재정립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ISO 13485와 GMP 밸리데이션 리스크 재점검의 필요성

EO 규제 연기가 되면서 내부적으로 '정지'됐던 GMP 밸리데이션 자료 점검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ISO 13485 기반의 품질경영시스템 상에서는 EO 멸균 공정의 위험분석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하고, 멸균 파라미터의 통계적 유효성 확보도 반복 검증 대상이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ISO 14971 기준과 함께 '위험 기반 접근'이 강조되면서 EO 멸균 프로세스 자체에 대한 리스크 매트릭스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단순히 공정 문서를 보완하는 수준을 넘어, 멸균 공정 자체의 의존도를 줄이는 방향으로 품질 시스템을 개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내 멸균 인프라의 지역 불균형,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지역별 멸균 인프라의 불균형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에도 지적됐지만 별다른 개선 없이 지속되고 있다. 충청권과 수도권에 집중된 EO 멸균 업체들은 이미 포화 상태이며, 지방 제조업체들은 물류비와 시간 손실로 큰 타격을 입고 있다. 특히 체외진단 시약의 경우 냉장 유통 조건을 요구하기 때문에 멸균 후 물류 기간이 길어질 경우 제품 품질 유지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 이번 연기를 계기로 정부와 산업계가 멸균 인프라의 분산 구축을 실현 가능성 있는 안건으로 올려야 할 시점이다.

‘EO 규제 = 산업 멸절’ 프레임은 위험하다

분명한 것은, EO 규제가 업계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을 것이란 점이다. 하지만 그 흐름에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기업은 결국 도태된다. 기술 혁신, 밸리데이션 체계 정비, 그리고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이번 규제 유예는 단순한 '연명'에 불과하다. 규제를 기회로 전환하려는 의지가 있는 곳에만 변화가 찾아온다. 현장에서 느끼는 위기감이 일시적인 해방감으로 무뎌지지 않도록, 다시 한번 체계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건 '다음 연기'가 아니다

EO 규제가 한 걸음 물러선 건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그 자체가 우리가 안심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불완전한 대응으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다음 규제 강화 때는 정말 숨 쉴 여유조차 없을 수도 있다. 이 짧은 틈에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어떤 기술적 방향성을 설정할지, 회사마다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다. 유예는 기회이기도 하고, 경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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